▲한국건강관리협회 전경

최근 발표된 충격적인 통계 자료는 우리 사회가 깊은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2024 손상유형 및 원인 통계’에 따르면, 자해·자살 시도 이유의 절반가량(45.6%)이 우울증과 같은 정신과적 문제였다. 노년층뿐 아니라 청장년층과 어린이들에게도 퍼져나가는 정신건강의 위기는 개인의 불행을 넘어선 사회적 문제이며,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한 상황이다.

사회적 현상에는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유독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큰 요인 중 하나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고, 남과 끊임없이 경쟁하고 비교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다. 학창 시절의 입시 경쟁부터 취업, 직장 생활, 심지어 결혼과 자녀 양육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노년기까지 삶의 모든 단계에서 타인과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조금이라도 못한 부분이 있으면 우울해하고 불필요하게 낙담하는 성숙하지 못한 문화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 토양은 우리 모두를 ‘육각형 인간’이라는 비현실적 목표로 내몰고 있다. 재력, 학벌, 직업, 외모, 인간관계, 자녀 양육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완벽해야만, 최소한 모자람은 없어야만 성공한 인생으로 인정받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단 하나의 영역이라도 부족하면 실패자, 실패한 인생으로 규정짓게 된다. 배우자를 고를 때도 이런 육각형 인간을 원하니 아예 결혼을 포기하는 청년들이 점점 늘어난다.

실제로 결혼을 앞둔 연인들이 수억 원에 달하는 전셋집을 마련하지 못하면 결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결혼 연령도 점점 높아지고 아이들에게도 극심한 경쟁을 위해 돈을 쏟아붓다 보니 양육에 엄두가 나지 않아 가뜩이나 낮은 출산율이 점점 더 낮아진다.

순위가 매겨진 성적표처럼 자신과 남의 삶을 평가하는 이러한 문화 속에서 많은 이가 스스로의 삶에 대한 평가를 통속적인 외적기준에만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 인생이 당초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잃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한 문화적 풍토가 높은 자살률과 큰 연관이 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내 삶의 자세를 스스로 선택하는 힘, 회복탄력성

삶의 핵심적 가치는 외적 조건에 있지 않다. 대부분의 외적 조건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로마시대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라”고 말했다.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풍요함 등 외적인 조건들은 대부분 우리의 의사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우리가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태도다. 삶의 고통과 비참함에 직면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너질지, 현실을 받아들이고 용기 있게 삶을 이어갈지, 내 삶의 자세를 스스로 선택하는 힘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적 가치이며, 이 힘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회복탄력성이 강한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회복탄력성을 높일 수 있을까? 우선 내 감정과 ‘나’라는 존재 자체를 동일시하지 않는 능력이 필요하다. 우울증에 빠지면 순간의 감정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고, 그래서 극심한 우울증 상태에서는 감정에 사로잡혀 극단적 행동을 하게 된다. ‘현재의 감정적 고통이 내 삶의 전부’라는 잘못된 생각이 극단적 선택을 불러오는 것이다. 현재 비참하고 절망적인 감정으로 괴롭더라도, 지금 순간을 어떻게든 견뎌내고 앞으로 꾸역꾸역 나아가다보면 결국 괴로움도 점점 옅어지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반면 극심한 우울증 상태에서는 순간의 감정에 굴복하여 용기를 아예 잃어버리고 인생이라는 단 한 번의 여정에서 허무하게 하차하게 되는 것이다.

회복탄력성을 높이려면, 우리는 평소 생활에서부터 행복과 즐거움이 삶의 목적이라는 미성숙함에서 벗어나, 더 높은 정신적 경지를 목표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삶은 오직 기분좋은 감정과 쾌락만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수준 낮은 동물적 경험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과 역경을 겪어내며 내면이 성숙해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온갖 괴로움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적 삶의 진정한 본질이다.

고통은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자 장자는, 『장자』 ‘추수 편’에서 재상 혜시와 대화를 하면서 “좋고 나쁨의 감정에 휘말려 자신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가르치며 감정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므로 감정에 휘말리지 않아야 함을 후세에 경고했다.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나치 강제수용소라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용기를 잃고 자포자기하지 않고, 도리어 그곳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명저를 남겼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고통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갈파했다.

그는 불후의 명작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강조했다. 프랭클에 따르면, 삶의 의미는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인생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고통을 수용하는 각자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비록 고통스러운 상황 자체는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없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반응할지는 온전히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고통에 굴복해 절망으로 삶을 끝낼 것인지, 아니면 용기를 끌어올려 버텨내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전진하며 한 단계 성숙해지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선택은 오직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빅터 프랭클의 가르침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여정의 핵심은 장자나 프랭클의 가르침처럼 ‘나’라는 존재와 ‘나의 감정’이 동일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데 있다. 우리에게 밀려드는 순간의 감정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 감정이 내 존재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나’라는 존재 안에는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내가 지나온 삶의 모든 길,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책임, 사회 공동체에 대한 책임 등 일시적인 감정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인간만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들이 존재기 때문이다.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표류하기보다는, 삶의 목표와 책임을 향해 고통을 견디며 묵묵히 나아가야 한다. 이는 마치 게임 속 주인공이 수시로 나타나는 괴물과 함정들을 극복하며 하나의 스테이지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를 목표하듯, 지금 주어진 인생의 단계를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고 다음 단계로 성장하며 나아가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할 삶의 의무다. 비록 지금 고통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현재의 감정이 나의 전부를 정의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용기를 내서 일어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구조와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타인의 삶과 내 삶을 극심하게 비교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는 수많은 이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으며, 삶에 당연히 찾아오는 실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가 섣불리 삶을 포기하도록 몰아가고 있다. 우리사회에서는 입시, 취업, 사업 등 삶의 중요한 단계에서 겪는 실패를 삶에서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불운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개인의 무능력과 나태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며, 이는 실패를 겪은 사람들의 극심한 좌절과 절망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실패와 그로 인한 고통은 성공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역설적 진리가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관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사업 실패자, 구직 실패자들이 재도전할 용기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도록 격려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를 정부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공동체에 얼마든지 기여할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재도전할 용기를 잃고 섣불리 삶을 포기하는 것만큼 불행하고 공동체에 해로운 일은 없다.

삶의 필연적인 고통과 불만족을 인정하자

많은 사람이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치료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높은 문턱으로 인해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신건강의 악화를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하는 잘못된 인식은 자살을 부추기는 요인 중 하나다. 정신과 진료 기록이 보험 가입 등에서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도록 법적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치료하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던 우울증으로 소중한 시민들을 잃어버리는 사회적 손실을 줄일 수 있다. ‘감기처럼 마음이 아프면 병원에 간다’는 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공익 캠페인을 진행하고, 학교, 직장, 미디어 등을 통해 정신건강 관리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여,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폄하하기보다는 지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는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행복이 무엇인지 규정하도록 구성원들을 부추긴다. 사람들은 자신의 완벽하지 않은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멋진 것을 갈망하며 SNS에 올라온, 남들의 완벽해 보이는 삶과 자신을 비교하며 비참함에 빠져든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인간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삶의 비참함 앞에서 용기를 잃고 쉽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상업적으로 규정된 지극히 통속적이고 천박한 물질적 풍요를 행복으로 규정짓게 한다.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자살하는 사람은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자살하는 사람들은 삶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으로 바꾸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고 그렇다고 현재의 삶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러운 현재 상태를 자살로서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삶의 필연적 고통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적 분위기가 강할수록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쉽게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혹한 내전이 벌어지고, 기근과 테러가 난무하여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씩 사람들이 비명에 죽어나가는 사회에는 역설적으로 자살이란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자살률은 대체로 치안이 좋고 안전하며 기근이 없어 생존 그 자체에는 위협이 없는 사회에서 도리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일상적 생존에 위협이 생길수록 사람들은 삶의 불완전함을 강제로라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며, 오히려 삶의 불완전함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성숙함이라는 문화적 공감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한국 사회에는 삶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문화가 몹시 부족하다. 아이가 반찬 투정을 하면서 이렇게 맛없는 건 못 먹겠다며 수저를 집어던지고 밥상을 뒤엎는 식의 정신적 미숙함이 사회 전체에 퍼져 있다. 육각형 인생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내던져버리는 것이 바로 그러한 미숙한 문화다.

물질적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와 같은 외적 가치 대신, 가정과 사회에 대한 소박한 책임감과 연대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적 분위기를 공동체 구성원들이 조성해나가야 한다. 사회적 성공이나 쾌락만이 삶의 목표가 될 수는 없으며, 삶의 소박한 순간들에 감사하며 최대한 빨리 독립하여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며 부모와 공동체에 보답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

자살률 감소는 단순히 한두 가지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실패가 삶의 필연적 경험임을 문화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정신건강 치료에 대한 낙인을 없애고, 삶의 불완전함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인식으로의 전환이 조금씩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정책적 고민도 필요하겠지만, 이러한 문화적 성숙은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공동체적 과제임을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