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 쌩쌩

친구야!

38선에는 무척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불겠구나.
이곳 응급실은 히터를 켜놓아 훈훈해.

그곳은 따뜻한 봄바람이 필요하겠지만
여긴 따뜻한 사람이 필요해.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아저씨
심장이 멎어 죽어있는 할아버지
교통사고로 온몸이 일그러진 젊은 애

배 아픈 아이
토하는 아주머니
이 곁에서 히터 바람은 따뜻해.

하지만 내 마음은 38선처럼 차갑네.

다른 사람 간도 콩팥도 이식하고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틈에 가슴이 답답하다던 할머니는
그렇게 뒷전에서 싸늘하게 죽었네.

친구야!

88올림픽, 엑스포 개최로
세계만방에 이름 떨친
대한민국 응급실에서 말이네.

- 글 / 이재준

노래하는 의사 '락터' 이재준 원장(부산 미래여성병원)이 이번에는 노래가 아닌 그가 의사가 되기 위해, 그리고 의사가 되고 난 후의 삶을 운율에 담은 시집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를 출간했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이 원장은 부산 미래여성병원 원장이자 록 밴드 리겔의 보컬로 활동 중이며, 리겔 1집 '하루'를 비롯해 여러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저서로는 자신의 본업과 관계된 '이재준 원장의 Q&A'가 있지만, 이후로는 지난 2021년 음악 에세이 '시간에 음악이 흐르면'을 발매했고, 이번에는 자전적 회고를 담은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를 출간했다.

그렇다면 이 원장은 노래나 산문이 아닌 시를 쓰게 된 것일까.

"누구나 시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원장의 대답은 예상외로 단순 명료하다.

▲부산 미래여성병원 이재준 원장

"오십이 넘어선 어느 날 새벽, 그날은 아침 일찍 한 시인의 강의가 예정된 독서 모임이 있었다. 그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오래전에 쓴 시가 생각나 서재를 헤매기 시작했다. 한참 후 책장 구석에서 낡은 수첩을 발견했다. 거기에 빼곡히 쓴 시가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시를 다시 쓰고 싶었던 것이…"

이 원장은 우리가 완벽하게 소통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원래 불가능한 것일지 모르고, 결국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이해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모두 시인이라고 말한다.

누구에게는 과거의 글이 미성숙한 자신의 흔적처럼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지만 이 원장은 오히려 '오래된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환희',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발효되어 다양한 풍미를 가지는 음식'이라고 표현하며, '예전에 쓴 글이 시간 속에서 변하는 모습은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바람

창가에 비치는 밝은 햇빛이
오늘 아침에는 참 아릅답습니다.

희망이 사람을 멋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작은 희망이 있습니다.
커다란 집도 멋진 자동차도 높다란 명성도 아닙니다.

봄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아침 햇살을
옆에서 같이 보아줄 친구가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 같이 좋은 날

그 친구를 만날 것 같은 생각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 글 / 이재준

허연 시인은 "이재준 시인은 삶의 비의(悲意)를 포착하는데 누구보다 뛰어나다. 그가 포착한 한 컷 한 컷은 그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철학적 사유로 새롭게 태어난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의 위태로움을 담담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그려낸 그의 시를 읽으면 묘한 안도의 순간이 찾아온다. 누군가의 심장이 멎기 직전 주변에 위급함을 외치는 응급실 의사처럼 그는 밤마다 시를 쓴다. 다들 눈을 뜨라고…"라며 이 원장의 시를 평했다.

박성식 평론가는 발문에서 "시집은 록 밴드의 보컬이자 음악 에세이의 저자라는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에게 음악과 시는 본질에서 하나다. '서문'에서 '시를 읽고 쓰는 일'을 '파동'이라고 한 것도 그러한 연유다. 그의 시들은 예전에 내가 펴낸 그의 에세이와 마찬가지로 음악에 대한 그의 주해다. 이재준은 소리로 태어난 아이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살다가 죽을지는 모르지만, 소리로 저 심연에 잠긴 세상과 접신했음을 확신한다"며 의사, 록 밴드 보컬, 시인이라는 그의 존재가 길항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시 세계를 소개했다.

하지만 시집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에는 단순히 그가 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나 의사가 된 후, 밴드의 보컬을 하면서 느낀 감성만 있는 것은 아니며, 시인으로서의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의사가 아닌 순수한 인간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재준 원장의 저서 '이재준 원장의 Q&A 산부인과'(좌)와 '시간에 음악이 흐르면'(우)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로니 제임스 디오 형님이 사망한지 벌써 15년이 되어간다.
내가 자주 불렀던 블랙사바스의 'Heaven&Hell'을 듣는다.
규칙적이거나 불규칙한 맥박이 느껴진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고등학교 시절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LP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바늘이 가느다란 음표의 계곡을 넘나들 때
거기서 흘러나오는 장엄한 기타의 전주곡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가사의 내용을 알고는 더욱 흥분하게 되었다.
The closer you get to the meaning, sooner you'll
know that you're dreaming
이렇게 심오한 가사를 들은 적이 없기에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합주할 때,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한 명의 사제처럼
주이상스를 향한 목마름은 속박과 충동을 조율하면서 도달한다.
밴드 구성원 각자는 무아지경에서 자기만의 황홀을 느낀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지금 내 방안에 울려 퍼지는 디오 형님의 목소리를
LP와 턴테이블과 바늘이 음악의 계곡을 통과할 때의
소리로 듣지는 않는다.
음악의 완성은 시간의 흐름 속 반복할 수 없는 유일무이에 있지만
이제 나만의 아카이브인 Tidal을 통해서 쉽게 반복한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편리함이 아쉬움을 만드는 건 왜일까?
클릭 한 번에 나타나는 디오 형님이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진다.
내게 허락된 미칠 자유를 위해
다시 한번 LP를 꺼내는 제사의 순서를 시작해야겠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 글 / 이재준

거기에 의미 없는 미사여구의 나열이 아닌 진솔하게 던지는 언어와 중간중간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허무 시, 그리고 의사에 대한 어두운 성찰과 동일인이 쓴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감성 가득 담긴 서정시는 독자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라는 말로 '퉁'쳐 버리는 것이야말로 이 원장이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지은이 / 이재준
펴낸곳 / 도서출판 비엠케이
페이지 / 116page
가격 / 12,000원
ISBN / 979-11-89703-84-4 03810